올해 극장에서 본 첫 영화, 물론 IMAX 3D로 보았다.
지난 번 싱크 안 맞는 호빗을 보고 항의 했더니 날라온 관람권으로 관람.
소설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원작이랑 어떻게 다른지는 비교할 순 없고,
익숙한 배우라곤 단역으로 나온 제라드 디빠르디유 밖에 없었다.
아 앙리 감독도 잠깐 단역으로 나온 것 같았는데.
이 영화는 3D 효과면으로는 딱 이등분으로 나눠지고,
극적 서술로는 3가지 이야기로 나누어 진다.
첫째 이등분은
환타지, 혹은 바다 위에서 보여지는 3D와 일상 혹은 회자에서 보여지는 3D
확실히 앙리 감독은 예사로운 감독은 아닌 듯,
단순히 입체감의 기준이 아니라 아 3D는 기술을 넘어 어떤 영화 문법으로 여러 감독들에 의해서
자리 잡혀 가고 있는 듯한 양상이다.
둘째 삼등분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패쓰하고,
마지막에 침상의 파이가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하는 장면에서 왜 감독은,
제라드를 같은 대배우를 (왕년에) 단역으로 썼는지 이해가 갔다.
중반 씬 한 두 장면에 나오면서도 단지 이야기에서 관객들이 (물론 배우에게 익숙한)
상상하게 되는 내용 속에서 제라드는 홀로 아케데미 수상감으로 그려진다.
그 외에는 음, 신론이나 철학적인 사조는 사실 이 영화에서 별 도움은 되지 않는 듯하다.
뭔가 얘기하고 싶은 듯 하지만, 얇고 깊이도 없고, 깊은 울림도 없다.
사실 그 보다는 거장 감독의 또 3D를 통한 또 다른 영화 문법의 탐구 정도가 가장 어울 릴듯 하다.
아이맥스로는 필견.
사족 하나
리차드 파커 대신 자꾸 피터 파커가 생각 난다.
사족 둘
인도 사람의 영어 발음 때문에 자꾸 빅뱅이론의 라쉬가 오버랩되서 웃겼다.
앞 집에 사는 아이가 주었는데, 어미가 없었다.
어쩌다 그렇게 버려졌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정말 작았다.
갓 태어난 아기를 보는 느낌보다 더 두근거렸다. 조그만 상자에
휴지를 넣고 그 위에서 짧게 숨을 쉬는 고양이는 결국, 우리 집에서 식은 우유를 먹으며, 몇시간을 머물다, 다시 원 주인에게로 돌아갔고 하루도 못되 죽었다는 이야기를 다음 날 들었다.
새벽녘에 핸드폰에 새끼 강아지를 주었다는 문자가 찍혔다.
반쯤 읽다가 다시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난 그 신림동 집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고양이는 거기 없었다.
가끔 그립지만,
꿈에서 내가 키웠던 작은 놈들은 종종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그립지 않나보다.